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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지순례기] 2025년 01월 제36호-은총과 평화 가득한 세계 성지순례 ⑬메소아메리카의 과달루페
작성자 : 천주교서울국제선교회(sicms1004@gmail.com) 작성일 : 2025-01-24 조회수 :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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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과 평화 가득한 세계 성지순례 ⑬



메소아메리카의 과달루페



김원창 미카엘



중남미 순례 일정은 그동안 소수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하게 비싼 비용, 2~3일에 한 번씩 이용해야 하는 비행기 일정의 압박, 치안에 대한 걱정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앞서 순례자 본인의 체력에 대한 우려 때문입니다. 중남미 대륙의 넓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거대합니다. 과달루페를 순례하는 김에 중남미 대륙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려고 이곳저곳을 일정에 다 넣다 보니, 긴 여정에 비싼 순례 비용 그리고 체력에 대한 부담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최근에는 이런 부담을 줄여 길지 않은 여정과 순례에 필요한 장소만을 선택해서 계획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면서 중남미 순례를 떠나는 분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남미 대륙의 일부이고 과달루페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라는 명칭은 명확하게 어느 지역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북서부를 포함해 공통적 문화를 가진 아메리카의 일부 지역을 일컫는 단어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곳에서는 마야, 테오티우아칸, 아즈텍 등 우리에게는 조금 멀게 느껴지는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해 왔던 화려한 문명이 생겨났고 유지 되었습니다. 15~16세기에 걸쳐 스페인이 진출하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지키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고요. 스페인을 통해 메소아메리카는 지중해 지역에 알려지게 되었고 반대로 지중해가 가진 문화적 전통도 이곳에 전해졌습니다. 천주교서울국제선교회의 양성센터가 있는 파나마 역시 메소아메리카에 속해 있는 지역입니다.


지중해의 다른 나라가 아니라 스페인이 이곳을 발견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습니다. 스페인은 그리스도교적일 뿐 아니라 이슬람, 유대, 그리스,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의 향기까지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다 양성을 가진 나라입니다. 어차피 메소아메리카의 고유한 색채에 다른 색이 덧입혀져야 했다면, 스페인이 가진 이런 다양성은 그들에게 유용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지만 여전히 그 고유하고 독특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그 위에 그리스도교의 색을 입힐 수 있었던 이유가 그 다양성에 기인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메소아메리카의 절반은 수백 년 전 스페인의 선박을 통해 전해진 지중해 문화지만 나머지 절반은 어떤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들만의 고유한 향기를 가진 또 다른 문화입니다. 매우 스페인다운 그러나 매우 그들다운 문화가 동시에 보존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반 여행이 아니라면, 중남미 순례의 중심은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특히 과달루페 성모 발현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 발현지를 손꼽아보라면 루르드와 더불어 첫손가락에 꼽히는 바로 그곳입니다.


과달루페는 '멕시코 사람의 89%는 가톨릭 신자지만, 과달루페노(과달루페의 성모님을 사랑하는 사람)는 100%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즈텍의 후예인 멕시코인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든 작든 과달루페 성모의 모습이 새겨지지 않은 건물이 없을 정도이고, 심지어 조직 폭력배의 팔뚝에도 과달루페 성모님이 새겨져 있습니다. 멕시코뿐 아니라 중남미의 모든 사람에게 과달루페 성모님의 흔적은 그들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과달루페는 이름부터 특별한 성모 성지입니다. 대부분의 성모 성지가 '루르드', '파티마', '반뇌' 혹은 '노크'처럼 발현 장소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과달루페는 성모님과 목격자인 후안 디에고의 대화 속에서 따온 호칭입니다. 과달루페는 여러 가지 뜻을 가졌습니다. 멕시코에서 성모님께서 발현하기 이전에도 스페인에는 과달루페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아랍어로 '와디 알 루프'(검은 바닥을 흐르는 강)라는 뜻을 가진 것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하지만 성모 발현지를 지칭하는 과달루페라는 호칭은 '테콰틀라소페우(Te Quatlaxopeuh)', 곧 '돌뱀을 쳐부순다'라는 성모님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에 기인한다는 주장이 가장 근거 있고 대중적인 학설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돌뱀은 아즈텍인들이 섬긴 '날개 돋친 뱀(퀘트잘코틀)'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스페인이 이곳에 진출하기 전 멕시코시티 주변을 중심으로

살던 아즈텍인들은 해마다 2만 명 이상의 여자와 아이를 돌뱀신을 비롯해 여러 신에게 피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인신 공양이 아즈텍 문화의 중심이었던 셈이죠. 테페약 언덕에서 50세가 넘는, 늙고 가난했지만, 하느님께 충실한 원주민 '후엔 디아고'에게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돌뱀의 우상을 물리치고 이곳 아메리카를 당신 옷자락 안에 품고자 하셨습니다.


인디오들의 전통과 신화에 따르면 세상은 신들의 희생 제의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들은 창조의 첫새벽에 테오티우아칸의 커다란 화톳불 주위에 둘러앉았습니다. 그들은 누가 세상을 비출 태양이 될지를 결정해야 했고, 그들 중 하나가 불로 뛰어들어 자기 몸을 희생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보석을 휘감은 아름다운 신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겁먹은 표정을 짓는 순간, 노쇠하고 키 작은 신 하나가 불

속에 몸을 던졌고 그는 태양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름다운 신도 불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녀는 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두 빛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 두 빛을 움직일 또 다른 희생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이 신화에 의하면 '인신 공양'은 세상을 비추는 태양과 달이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만드는, 누구나 필요한 경우에 기쁘게 희생해야 하는 신앙생활의 일부입니다. 신들의 자기희생에 의해 빛이 생긴 것처럼, 태양과 달의 움직임은 인간의 희생으로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 신화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런 전통 신앙은 자연이 주는 공포(태양이 멈추면 모든 세상을 파멸된다는 사실)와 그 공포를 해결할 방법을 그들 나름대로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태양과 달을 포함한 모든 자연은 본래 '아름답게 질서 지어진 것'이며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자연이 우리를 두렵게 할 때는 오직 우리가 자연을 하느님의 창조물로 대하지 않고 '도구'로 여길 때뿐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생명을 불어넣은 모든 인간은 동일하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피부색이나 지식의 정도나 사회 경제적 지위로 사람을 구분 짓고 한 무리의 사람을 '도구'로 여길 때, 하느님의 창조 질서는 파괴됩니다. 하느님을 경시하고 스스로 경건하지 못하며 타인을 존중하지 못할 때 노아의 홍수의 예처럼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은 한순간에 어두운 심연에 잠기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테페약 언덕에서 인디오의 복장으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이야기하며 나타나신 것은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그들이 지켜온 종교적 가치의 잘못된 전통은 바로잡고 싶은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정복자로 나타나 폭력을 행사하는 스페인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발현 이후 순식간에 중남미의 원주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후 스페인의 식민 정권에 대항하는 상징으로 과달루페 성모님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은 스페인의 치하에서 고통받는 메소아메리카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메소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지 10년 후에 발현하셨는데,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오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강제노역과 착취를 당해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해양 강국들이 '황금의 땅'이라 부르며 남아메리카와 메소아메리카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개발하면서 원주민을 노예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믿어왔던 종교에서 가톨릭으로 강제로 개종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게 된 그들에겐 그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원주민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사람은 절대로 사제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느낀 처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인 피라미드 신전 등을 파괴하고 그 신전 위에 성당을 지었습니다.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으면서도 흰 피부를 가지지 않으면 노예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이율배반을 경험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위기에 성모님께서는 아무 힘없는 원주민 가운데 한 명에게 모습을 드러내셨고, 이후 지속적인 기적과 치유를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들이 지난 시절 빠져 있었던 우상숭배의 위험을 멀리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 전파의 열정을 위장해 착취를 일삼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폭력에서도 그들을 지키고 싶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달루페는 다른 성모 성지와 구별됩니다. 화려한 루르드는 발현 성지의 거룩함(聖)과 길 건너의 성물 가게가 가득한 세속(俗)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이것은 파티마도 마찬가지이며, 반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라살레트 성모 발현지도 해발 1,900m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산 아래의 세속과 확연히 구별되는 장소로 인식됩니다. 그런데 과달루페는 그런 성(聖)과 속(俗)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성지 안에서도 거룩함과 세속의 모습이 전혀 구분되지 않고, 두 모습이 하나인 것처럼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거룩함과 세속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삶의 흔적에서도 거룩함은 언제나 현존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파티마 성지에 마련된 '속죄의 길'을 무릎걸음으로 걷는 신자들의 모습과 과달루페 곳곳에서 무릎걸음을 걷는 이들의 모습은 같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보통의 순례지에서 만나게 되는 거룩함은 일상에서 구분되고 단절되어 세속과 대립하는 것이라면, 과달루페에서는 그 성과 속의 구분이 사라지고 하나의 행위에서 두 모습이 한 번에 드러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시티 북쪽에 자리 잡은 과달루페 성지를 한 번 방문하고 나면, 그 이후에 메소아메라카 어디에서도 그 경험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이 종교적 행위이며, 때때로 미신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우리 신앙이 성지나 성당에서만 느껴지는 위안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발휘되는 전 우주적 사건의 연속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과달루페 순례가 남기는 위대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남미 순례를 가실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가요? 그렇다면 성지나 성당처럼 거룩함의 장소로 구분 지어진 곳뿐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살필 수 있는 눈썰미를 준비하시면 좋겠습니다. 잘 준비하고 떠나시게 되면, 중남미 순례는 다른 순례와 다르게 미사를 봉헌하거나 성사가 행해지는 순간뿐 아니라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도, 식당으로 걸어가는 거리에서도, 주차장 벽에 그려진 낙서를 살피는 시간에도 순례가 끊어지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세속의 일상에서 거룩함이 묻어나는 장소가 바로 과달루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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